어떤 사과와 어떤 보상

지나간 한겨레신문 기사이다.

20년만에 화해의 손길…고문기술자 이씨도 참회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설을 맞이해, 자신을 고문했던 이근안 전 경감에게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김 장관은 지난 7일 경기도 여주교도소를 찾아가, 수감 중인 이 전 경감을 30여분간 면회했다고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이 10일 전했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지난 1985년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이 전 경감이 김 장관을 전기고문하고 물고문한 이후 20년만에 처음이다. 이 전 경감은 이 사건 등으로 장기간 도피하다 지난 1999년 자수해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다.

김 장관은 이 전 경감에게 “과거 갈등이 깊은 시절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났지만, 세월의 흐름속에서 과거의 원망이나 미움, 원한은 잊었다”며 “용서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장관은 또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 사회와 이웃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거듭 태어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 전 경감도 과거에 자신이 저질렀던 고문 행위를 뉘우치고 있다며, 용서를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장관은 이 전 경감이 자수해 고문 사건이 다시 화제가 되자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모욕적인 상황이어서 기억하고 싶지않다”는 심경을 밝히는 등 그동안 고문의 기억 때문에 상당한 고통을 겪어왔다. 김 장관은 고문 후유증으로 심한 비염을 앓아오다 2001년 수술까지 받았으나, 완치가 되지 않고 있다.

김 장관의 측근은 “김 장관이 고통스러운 과거를 완전히 정리하고 싶었을 것”이라며 “과거의 상처로 갈등이 깊은 우리 사회가 용서와 화해를 통해 새출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 측근은 “이 전 경감도 종교에 귀의한 뒤 종교인을 통해 김 전 장관에게 참회의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등록 : 2005.02.10 18:54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발췌]

고문후유증 앓는 김근태 전 장관 수년째 파킨슨병 앓아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1985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년) 의장 시절 당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전기·물고문을 받으며 ‘짐승의 시간’을 보낸 후유증으로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1980년대 고문수사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높아지고 있다. 김 전 장관은 지난 10일 딸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시절 고문 수사를 일컬을 때마다 등장하는 인물이 이근안 전 경감(72·현 목사)이다.

1988년 12월 <한겨레>가 김근태 전 장관을 직접 고문한 ‘얼굴없는 고문기술자’의 실체를 얼굴 사진과 함께 처음 보도한 뒤 이씨는 11년간 도피생활 끝에 자수해 7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그런데 김 전 장관의 투병생활이 보도되면서 이씨의 행적이 다시 주목되고 있다. 트위터에서는 지난해 2월 시사주간지 <일요서울>에 두차례 걸쳐 보도된 이씨의 인터뷰 기사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이씨는 인터뷰에서 자신은 고문기술자가 아니며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심문기술자가 맞을 것 같다”며 전기고문 등 고문수사 행위를 전면 부인했다.

“논리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이와 이를 깨려는 수사관은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인다. 그런 의미에서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비록 나는 그 예술을 아름답게 장식하지 못했지만.”

그러면서 그는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은 일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애국’이라고 표현했다.

강제심문은 있었지만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끔찍한 전기고문은 없었다며 실체가 과장됐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김근태 상임고문에 대해서도 “건전지 2개를 이용해 겁만 주었기 때문에 고문이 아니”라며 자신의 심문은 “일종의 예술”이라고 강변했다.

김근태 전 장관 고문 사건에 대해 법원은 고문 사실에 대해 유죄를 인정해 7년형을 선고했지만 이씨는 “당시 전기고문의 실체는 내가 취미삼아 만든 모형 비행기 모터에서 뺀 AA 건전지 2개를 이용해 겁을 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김 전 장관 사건과 관련해 “그의 입을 열게 할 방법으로 고안한 것이 이른바 전기고문이었다”면서도 실행한 것은 전기고문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때 김근태씨를 앞에 두고 두시간 넘게 일부러 말로 겁을 줬다. ‘너같은 녀석은 전기구이를 해버려야 바른 말을 한다’는 식으로 상대를 주눅들게 한 것이다. 한참 후에 눈을 가린 뒤 맨발닥에 소금물을 뿌리고 건전지 두개를 대며 계속 겁을 줬다. 이미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찌릿찌릿한 감각이 느껴지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나.”

그러나 겁만 주었다는 이씨의 주장과는 달리 당시를 회고하는 김근태 고문의 진술은 고문의 악몽을 생생히 증언한다.

“소리를 지른다고 강하게 전류를 통하게 하고, 신음 소리가 나지 않도록 혀를 이빨로 꽉 물었다고 혀를 빼라며 강한 전류를 또 흘려보내고, 참으면 참는다고 또 그러고 이들의 목표는 총체적인 혼란, 착란상태로 돌입”(1987년 나온 ‘김근태의 이근안에 대한 기억’)

“머리가 빠개질 듯한 통증이 오고 그 몰려오는 공포라니,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파고드는 것처럼 아른 거렸습니다. 전기가 발을 통해서 머리 끝까지 쑤셔 댈 때마다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기고문은 담금질해서 뜨거운 불인두로 지져서 바싹 말라 바스락뜨리고 돌돌 말려서 불에 뛰기는 그런 것입니다. 전기고문은 핏줄을 뒤틀어놓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마침내 마디마디 끊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이씨는 자신은 전기고문은 물론 일체의 고문기술을 자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관절빼기’ ‘볼펜심 꽂기’ ‘통닭구이’ 등과 같은 이씨의 전매특허로 알려진 고문기술에 대해서도 “주먹으로 몇대 쥐어박거나 유도 기술을 이용해 업어치기 정도는 했다. 이것을 고문이라고 하면 변명하지 않겠지만 그 이상의 가혹행위는 없었다”며 전면 부인했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심문이 안되면 할 수 없이 강압심문을 하게 된다”며 자신의 행위를 강압심문이라고 했다.

그는 “과거 심문과정에서 난동을 부리는 피의자 몇명을 완력으로 제압하다 팔이 빠지는 경우가 있긴 했다”면서 “아마 이런 일화 때문에 내게 ‘기술자’라는 호칭이 붙은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피의자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고”라고 주장했다.

그는 공안사건 관련 인사들이 고문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 합리화 때문이라고 강변했다.

“공안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은 비밀 결사 등 조직에 소속돼 있다. 조사를 받은 이들 상당수는 해당 조직 기밀을 당국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원래 조직으로 복귀한 뒤 대접이 예전만 같겠는가. ‘배신자’ 소리 듣지 않으려면 비밀 누설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대야 한다. 결국 ‘고문에 못이겨서’라는 대답이 제일 타당하지 않겠냐.”

그는 또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납북어부 김성학 사건 등은 자신이 한 일이 아닌데도 “언론은 고문이란 단어만 나오면 이근안을 팔았다”면서 억울함을 호소했기도 했다.

이씨는 <일요서울>과 한 두차례 인터뷰 기사에서 오랜 도피 생활과 수감 생활 중 자신이 겪고 느낀 가족애와 부정(父情)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가족들 앞에서 나는 그저 죄인”이라며 “고문 기술자의 가족이라는 손가락질 때문에 정상적 생활이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특히 수감생활 중 세상을 떠난 둘째 아들에 대해서는 각별한 부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둘째가 아들 셋중에도 특히 착했다. 매주 면회를 오던 둘째 놈이 어느 날 ‘아부지, 나 오래 못 살게 될 것 같아요. 병원에서 심전도 검사를 했는데 결과가 안좋습니다’라며 침통해 했다. 평소 당뇨가 있긴 했지만 나이가 젊어(당시 39살) 설마했다. ‘아비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마라’고 호통을 쳤는데 꼭 한달만에 심근경색으로 죽었다.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또 막내아들에게 취직 자리를 알아봐주겠다고 하자 “죽어도 아버지 덕은 안본다”며 “노동판에 나가는 막내 녀석이 야속하면서도 가슴 아프다고 털어놓았다”고 이씨는 털어놓았다.

2008년 정식으로 목회자가 된 이씨는 “당연히 이근안 목사가 맞지 않겠느냐. 경감은 30년 전 직함일 뿐”이라며 현재 목사 활동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이씨는 1998년 어둡고 눅눅한 천장에서 생활하다 종교에 귀의하게 됐다고 말했다. “어느 날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부친이 독실한 크리스찬이셨다. 자연스럽게 아버지 손때가 묻은 성경책에 손이 갔다. 이후 10년 동안 노트에 3400개가 넘는 성경 구절을 손으로 베껴 쓰며 공부했다. 자수를 결심한 것도 성경 공부 한 덕분이다. 요한 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란 구절이 있다. 이 말씀을 받아 적으며 나 역시 스스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결심이 섰다.”

그러나 이씨의 회개가 진정한 의미를 갖고 있을까?

그는 ‘시간을 돌려 과거로 간다면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일요서울> 기자의 질문에 “아니다.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자신의 과거 행적에 강한 자부심을 피력했다.

이에 대해 지난 4년간 1980년대 고문피해자의 심리상담을 통해 이근안씨를 비롯해 고문기술자의 행태를 너무나도 자세히 알고 있다는 정신과 의사 정혜신 마인드프리즘 대표는 11일 트위터에 “이근안, 당신이 목사라구요? 예수가 통곡합니다”라고 분노를 표시했다.

등록 : 2011.12.12 15:45

김도형 선임기자aip209@hani.co.kr


이근안, 목사직 박탈당했다

이근안(사진)씨가 소속됐던 기독교 교단이 이씨의 목사직을 박탈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개혁총회 이도엽 교무처장은 19일 서울 관악구 총회 사무실에서 <한겨레> 기자와 만나 “지난 14일 징계위원회를 열어 이근안 목사를 면직시켰다”며 “향후 복직도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이 교무처장은 “이근안씨가 과거에 고문기술자로 살았던 삶을 회개하고 목사로서 신중한 삶을 살았어야 하나, 직분을 망각하고 반공강연에 나서 ‘고문은 예술’, ‘나는 애국자’라는 식으로 자신의 행위를 미화했다”며 “이로 인해 이씨가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교단의 명예를 손상시켜 이같이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씨가 언론에 한 발언이 문제가 되자 총회장이 이씨를 불러 주의를 주기도 했다”며 “이씨가 김근태씨의 유가족을 찾아가 진심으로 사죄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교단은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이 별세한 뒤 이씨를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자, 바로 이씨를 불러 소명을 들으려 했으나 2주간 연락이 되지 않아 징계위원회 개회가 늦어졌다고 해명했다.

이씨는 2008년 10월 합동개혁 교단의 통신신학 과정을 이수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교단은 이씨가 통신신학 과정으로 목사 안수 자격을 획득한 것이 문제가 되자, 통신신학 과정도 폐쇄하기로 했다. 교단은 또 “이근안씨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목사 안수를 줘 많은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앞서 이날 오전 한국종교개혁시민연대와 한국교회정화운동협의회는 총회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씨의 목사 안수 철회를 요구하고, 5000명의 서명이 담긴 탄원서를 교단 쪽에 전달했다.

등록 : 2012.01.19 21:08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발췌]

19대 총선 당선자 인터뷰 서울 도봉갑 인재근

서울 도봉갑의 민주통합당 인재근 당선자(59·사진)는 새누리당 유경희 후보(47)를 1만4천표 이상 여유있게 꺾었다. 58% 대 40%였다. 지난 연말 타계한 김근태 전 의원에 대한 추모 열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인재근 당선자는 “이명박 정부의 경제파탄에 대한 서민의 심판, 김근태 의장에 대한 미안함이 표를 몰아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선거에서 패했다. 그는 선거 패배의 이유를 “국민이 바라는 공천을 하지 못했고 민주당이 변화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반이명박 정서에만 의존해 기득권에 안주했다는 것이다. 김근태 전 의원을 돕다가 직접 국회의원으로 나선 이유가 문득 궁금했다.

“장례 때 젊은 엄마들이 어린아이의 고사리 손을 잡고 와서 ‘저분이 민주주의를 위해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분’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49재가 지나면서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두렵다는 말도 덧붙였다.

“인재근에 대한 기대를 넘어 김근태에 대한 기대가 함께 있기 때문에 정말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더욱 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거공약을 ‘따뜻한 서민의 친구’로 내세웠던 인재근 당선자는 19대 국회에서 보건복지위원회를 하고 싶다고 했다. 경제 파탄으로 살기 힘들어진 서민들이 다시 경제적 안정을 찾으려면 복지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등록 : 2012.04.18 20:26

글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

여기 네 꼭지의 신문기사가 있다. 어느 고문피해자와 가해자의 화해, 그 고문피해자의 후유증과 고문 가해자의 자기 합리화, 그리고 그 피해자는 이 세상을 떠났다. 그 고문 가해자는 목사 안수를 받고 사회에서 훌륭한 일을 하다가 사회의 배척을 받았다. 그가 진정한 회개를 하지않고 이전의 자기 행동을 정당화 했기 때문이다. 그 고문 피해자의 아내는 피해자가 이 사회 민주화에 헌신한 희생을 인정받아 지금 국회에 입성할 준비를 하고 있다.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국민들은 이 일련의 사건 전개에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그 고문 가해자의 편에서 그의 안타까운 우국충정에 동정하는 일부 국민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자기가 경험하지 않으면 실감하지 못하는 그렇게까지 몹쓸 짓을 했을까 하는 선량한 심성을 가진 국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사과는 과연 가능한 것인가, 진정한 회개는 가능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 배우자의 조그만 보상은 우리의 일말의 양심의 발로이겠지만 그것도 상황 전개에 따라서는 언제고 지속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 당시에 사회 상황이 절박하다고 그 상황에 편승해서 인간성을 말살할 만큼 인간성을 핍박한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것이며, 그 잘못을 인정할 만한 용기가 있느냐이다.

문제가 종교에까지 연결되어 하나님이 용서하시면 모든 것이 깨끗하게 세탁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하나님이 과연 그러한 잘못까지 용서하셨을지 궁금한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고문피해자의 배우자에게 준 우리의 의사표시는 우리의 집단지성이 어디를 향하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2012. 05. 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