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기장이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이사야 64장8절)
But now, O LORD, thou art our father; we are the clay, and thou our potter; and we all are the work of thy hand. (KJV)

 

성경에서 쓰인 바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모두 흙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창 2:7, 창 2:19). 그 구성성분이 흙의 성분과 같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입니다. 지구 생명체가 우리가 사는 이 지구가 아닌 우주공간에서 날마다 쏟아져 내리지 않는다면 새로 태어나는 생명체는 흙의 성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하면 모두 맞지는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 중 바다 속에서 사는 것도 있을테니까요. 그것은 무엇으로 만들어질까요(창 1:20)? 아마도 바다 물 속에서 특히 고기가 먹는 먹이에서 그 후 세대를 만들 물질 성분을 취하지 않을까요. 논의를 전개하다 보니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고기의 경우 바닷물의 성분과 먹이의 성분을 분석하여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는 물 속에 사는 생물들은 흙으로 명시하지 않고 “물들은 (그 속의) 생물들을 번성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분석적인 명석한 머리로 유추하면, 결국은 모든 생명체는 이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 성분으로 구성되었고 그 생명이 다하면 분해과정을 통해서 원래의 성분으로 돌아가서 흙 속으로 환원되는 것입니다(엄밀하게는 대기나 물 속으로도 흡수되겠지만). 지구를 구성하는 성분이 지구가 생성될 때부터 있었던 고유한 것인지 아니면 우주에서 계속 공급받은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또한 물질을 이룰 수 있는 일종의 물질이 혼합된 수프형태로서 태초(太初)에 존재했던 모든 것이 뒤섞인 공허한 상태인 어떤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것이 성경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1장2절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And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 and darkness was upon the face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 of the waters.)”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하면 모든 것이 혼재된 끝을 알 수 없는 깊음이 존재하며 그 속에는 물질을 구성하는 성분들이 포함되어 있고, 그 위에는 깜깜하고 물 같은 형태를 띤 경계가 긴장상태에서 존재하고 그 위로 측량할 수 없는 지능을 가진 어떤 영적인 존재가 유유히 떠다니는 상태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흙으로부터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유난히 강조합니다. 우리 인체를 구성하는 성분이 흙의 성분과 비슷하다는 것, 엄밀하게는 흙 속에서 모든 성분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유한(有限)함을 일깨웁니다. 우리가 자연계의 일부분이고 자연계를 초월할 수 없으며 그 속에서 지극히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존재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전도서 3장20절)
All go unto one place; all are of the dust, and all turn to dust again. (KJV)

물론 우리에게는 우주(宇宙)를 담을 수 있고, 사유할 수 있는 정신세계가 존재합니다. 인본주의(人本主義)가 바라보는 그 세계는 또 하나의 작은 우주가 우리 안에 존재한다고 말해집니다. 자유함이 있고 의지가 있으며 무궁무진하고 엄청난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냉정하게 성찰해 보면 그 정신이라는 것과 의지는 지극히 불안정하고 보잘것 없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 정신적인 면과 자유 의지를 깊이 연구할수록 결국 어떤 한계에 다다르고 맙니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이사야 45장9절)
Woe unto him that striveth with his Maker! Let the potsherd strive with the potsherds of the earth. Shall the clay say to him that fashioneth it, What makest thou? or thy work, He hath no hands? (KJV)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결과로서 인생을 살아갈 뿐이지 우리의 자유의지로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만든 존재와 다투는 것은 흙덩이끼리 서로 부딪쳐 싸우는 것과 같이 어리석을 뿐입니다. 그것은 오만이며 싸울수록 터진 질그릇 같이 우리 자신을 망칠 뿐입니다. 우리가 유한한 존재이고 죽어서 갈 길을 알고, 우리 인생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면 나란 존재와 환경을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이 가능합니다.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예레미야 18장4절)
And the vessel that he made of clay was marred in the hand of potter: so he made it again another vessel, as seemed good to the potter to make it. (KJV)

 

너무도 뻔한 이야기이지만 여기에서 진흙이나 토기는 인간을 말하겠고 토기장이는 토기(土器)를 만드는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토기장이는 소위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권리입니다. 이는 능력도 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릇을 만드는 의사와 능력과 권리를 가지고서 자기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릇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한번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토기장이의 선의가 아니었다면 그릇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기초 소재인 흙의 상태로 그저 토기장이의 처분만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흙”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논쟁과 항변이 될 환경이 아닙니다. 지능을 가진 지성인의 눈에서 보면 이것은 토기장이의 주권적 권리일 뿐입니다. 창조주를 믿는다면 우리 인생은 그의 주권아래 일시적으로 주어지는 축복으로서 그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할 한번 만의 기회로서 인식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인생을 주도하고 만들어 간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권자의 선한 은혜를 의지하고 감사하며 인생을 살아간다면 다른 세계가 우리 눈앞에 펼쳐질 수 있습니다.

201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