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문의 논설위원께서 기고한 칼럼에 이런 내용이 있는 것을 읽었다. 우리가 남들과 교체할 때 세가지 조심해야 할 주제가 있는데 정치와 종교와 지역감정이라는 것이다.

옳으신 말씀이다. 그 세가지의 공통적인 특징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무의식에 가까운 가치체계에 관련된 문제이니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훼손할 수 있는 민감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친한 친구 사이라도 이 문제에 이르러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하여야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치 중심적이고 민감한 문제가 종교이다. 이 주제에 이르러서는 우리가 믿고 있는 가치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핵심에 접근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이 주제에 관한 나의 커밍아웃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는 얼마전부터 개신교를 믿기 시작하였다. 나의 논점이 다소 그쪽으로 흐르더라도 탓하지는 마시기를..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우리는 착하고 선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극한적인 환경을 통하여 인간성의 냉혹함과 비정함에 절망한 사람은 악하고 힘있는 자가 형통하리라고 믿는다. 먹는데 부족함이 없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이것은 자신의 환경에 갇혀버린 지극히 편협한 사고의 결과이다. 어떤 사람은 사회정의가 바로 서는 사회가 최고라고 믿는다. 그러기에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사회정의를 세우는데 자신의 모든 일생을 건다. 이념의 문제도 한 사람의 인생을 걸 정도로 최상의 가치를 갖는다. 몇십 년을 감옥에 있더라도 그들의 가치체계가 변치 않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종교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고 순교를 미덕으로 삼으며 극단적으로는 자신과 대척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해치면서까지 자신의 종교의 가치를 세우려 한다.

 

우리가 믿는 것은 조금 하등적인 가치체계와 조금 고등적인 믿음 체계로 나뉘어 진다.

하등적인 가치체계는 사회의 도덕적인 규범을 이루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하기가 쉽다. 이른바 사회정의라는 측면이 강하다.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양심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런 반면 고등적인 믿음체계는 조금더 복잡한 사유세계의 결과이다. 핵심 포인트는 사람이 궁극적으로 가는 길이 무엇이냐는 문제이다. 현세적인 삶으로 끝난다는 믿음을 가지면 향락적이고 위선적으로 흐르기 쉽다. 결국은 남을 의식한 자비행위와 자기 만족에 그치기 쉽다. 그러나 현세적인 삶 그너머를 생각한다면 현실을 초월하고 현실의 고난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쉽다. 또한 현세적인 삶 이후에도 그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느냐 주어지지 않느냐에 따라 믿음의 체계가 매우 달라진다. 동일한 기회가 계속 주어진다거나 사후의 상태가 어떤 변수와 노력에 의해 개선될 수 있다면 현세에서의 절박함은 매우 엷어진다. 그러나 현세적인 삶 이후의 세계가 지금의 삶에 의해 정해지고 그 상태는 영원하게 유지된다면 그 절박함은 매우 심각해 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자신이 경험한 과거에서 하등적인 가치체계를 형성하고, 자신의 선택적인 편리함으로 고등적인 믿음체계를 느긋하게 고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가 보는 견지에서는 인간의 보이는 세계는 시간이 유한하고 눈이 있으되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다 보지 못한다. 한마디로 아주 불완전하고 왜곡되기까지한 시야로 세계를 보는 것이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해 형성된 가치체계를 자기의 성찰없이 그대로 간직하는 경우까지 있다.

 

따라서 인간은 결코 남들이 보고 이해하는 세계보다 자신이 보고 이해하는 세계가 더욱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남들을 존중하고 좀더 따스한 눈길로 남들을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우리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본다. 그러기에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그러기에 우리의 믿음은 극히 부족하고 보잘것 없으며, 죽을 때까지 교정이 필요한 불안전한 것이다.

 

지금 자신의 주먹을 믿는가? 그 주먹은 지금 아무리 우람하여도 백년후에는 뼈와 가죽만 남을 것이다.

2013. 5.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