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 관창(花朗 官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패자의 이야기는 묻히고 승자의 입장에서 취사선택된 사실이 기록되어 전해져 역사가 된다. 꼭 승자가 아니더라도 기록 당시의 기득권 세력이나 다수 세력의 논리를 대변하게 된다.

화랑 관창 이야기를 마주 대하고 있으면 일견 상식적이고 타당한 논리로 그를 높이지만 꼭 화랑 관창이 이 사회에서 숭상되어야 하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하면 간단치 않는 배경을 유추하게 된다. 화랑 관창은 신라 화랑도(花郞徒)의 한 사람으로서 삼국시대 전장에서 죽은 많은 장수 중 하나이다. 전쟁의 와중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법이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단신공격을 감행하여 적인 백제 계백장군을 패퇴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여기에서 무슨 교훈이 있고 숭상할 것이 있는지. 그 전쟁의 밀고 밀리는 전투과정 속에 무슨 철학이 있는가. 있다면 어떻게 이겼다는 전술적인 측면이 있을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기세가 많이 누그러졌지만 한 때는 온 국민이 본받아야하는 호국의 정신인 화랑도(花郞道)로 승격되었다. 화랑 관창은 화랑도의 중심 이야기이다.

화랑도(花郞徒)의 이야기가 화랑도(花郞道)로 승격된 데에는 이 사회의 지배 헤게모니 냄새가 조금 묻어 나온다. 삼국시대의 정통은 신라인가?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정통성을 확보하였는가? 왜 우리가 지금은 같이 공존하는 국가영역인 삼국의 전쟁이야기에서 호국에 대한 정신자세를 찾아야 하는가? 우리나라를 지켰던 호국의 영웅들이 전 역사에 걸쳐 즐비한데 그렇게 좁은 역사의 한 시기에서 굳이 교훈을 찾으려 하였는지 궁금하다.

조금 수긍할 구석은 있기는 하다. 화랑도(花郞徒)는 젊은이들의 수양을 위한 교육집단이다. 자라나는 세대를 교육시키는 한 전형으로서 예를 들 수는 있겠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년들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킨 전통이 거의 없으므로 거기에서 청년들에게 국가적인 비전을 심고 역량을 키워 집중하는 교육시스템의 모델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 속의 적인 백제 계백장군도 국민적 존경을 받는다. 호국이라 함은 나라를 지켰다는 것인데 어느 나라를 어느 나라로부터 지켰다는 것인가.

신라 화랑 관창 이야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신라 화랑 관창은 신라의 유명한 장수 김유신과 백제의 장수 계백의 황산벌 전투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신라의 김유신은 5만의 부대를 이끌고 백제와 마지막 전투 황산벌에서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백제의 계백장군은 가족까지 모두 죽이는 비장한 각오로 황산벌 전투에 출전했기에 5천밖에 안되는 백제군이었지만 신라군이 쉽게 무너뜨리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이에 김유신은 황산벌 전투에서 4번싸워 4번모두 지게 되는 수모를 겪게 되며 당나라 소정방부대와 만나기로 한날이 하루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품일이라는 신라의 장군은 아들 관창에게 지금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할수 있는 2가지를 모두 할수 있으니 어찌 맞서 싸우지 않겠느냐며 독려하게되었습니다.

어린 신라 화랑 관창은 죽음을 무릅쓰고 백제의 적진으로 들어가 계백에서 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계백장군은 관창의 나이가 아직 어린 아이임을 알고 살려보내주게 되었습니다.

신라 화랑 관창은 세속오계에서 처럼 임전무퇴를 외치며 다시 적진으로 들어가 사로잡히게 되면서 백제의 계백은 관창을 칭찬하며 아깝지만 목을 베어 말에 목을 달아 적진으로 보냅니다.

관창의 죽음을 목격한 신라의 군사들은 관창의 복수심에 불타면서 백제의 적진을 뚫고 들어가 싸움을 승리로 이끌게 됩니다.

여기에서 신라 화랑 관창의 죽음은 신라군사들의 사기를 복돋아 주었으며 결국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직 어린 신라화랑 관창의 죽음이 목숨을 사리던 신라군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여 결국 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할수 있게 해주었던 것 입니다.

백제의 장수 계백장군이 가족을 죽이면서 5천 결사대로 신라의 5만을 맞설수 있었듯이 신라화랑 관창의 용감한 죽음 또한 신라의 승리에 큰힘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 입니다.

출처: http://aqaa.tistory.com/5

인용한 화랑 관창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거창한 대의명분이 발견되지 않는다. 계백은 결사의 각오로 가족을 죽이면서까지 자기의 퇴로를 없애고 백제를 지키기 위해 싸웠고, 이에 돌파구가 필요한 김유신 휘하의 김품일 장군이 자기의 어린 아들을 전쟁에 단신 투입시킨 것이다. 일종의 고도의 심리전술인 셈이다. 군사들의 전투의식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기어히 자기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아 군사들을 격앙시킨 것이다. 계백은 차마 어린 장수를 죽이지 못하고 살려 주었지만 냉혹한 김품일 장군은 전쟁의 승리라는 결과만을 중시한 것이다. 이 전투 이면에는 신라의 백제에 대한 끝없는 증오만이 보이지 같은 말 같은 풍습의 동족이라는 관념은 없다.

역설적이게도 계백은 몇 번이고 관창을 살려 돌려주어서 그의 죽음을 면하게 하려고(?) 애썼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을 모조리 죽인 그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에게 앞선 전투의 승리가 자만심을 심어준 것인가. 아니면 관창의 무모한 행동 뒤에 숨겨진 무서운 전략을 깨우치지 못한 무지일까.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신라의 심리전술에 말려든 것이다.

화랑에 대한 이야기는 신라의 김대문(金大問)이 저술한 화랑세기에 그 내용이 자세히 전해진다. 그 내용을 보면 그야말로 집권층 중심의 청년들의 친교 및 교육을 위한 집단으로 보인다.

판본이 전하지 않고 <삼국사기>에 극히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그런데 1989년에 조선 후기의 필사본으로 보이는 <화랑세기>가 발견되었다. 이 책은 총 16장 32면으로 후반부가 일부 탈락되어 있다. 분량은 총 7,406자이다. 이곳에 서술되어 있는 내용은 가히 충격적으로 근친혼(近親婚)·동성애·다부제(多夫制) 등 고대사회의 실상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아직 이 책의 위작 여부가 판명되지 않아 분명하게 단정지을 수는 없으나 이것이 진본이라면 고려시대 이전에 씌어진 역사서로, 유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서 중에는 최초로 발견된 사서가 된다. 고대사뿐만 아니라 중세 사학사 연구에도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저자인 김대문은 4세 화랑인 이화랑(二花郞)의 후손이다. 이화랑의 큰아들은 원광법사이고 둘째 아들인 보리(菩利)는 12세 화랑이 되었다. 김대문은 보리의 아들 예원(禮元)의 손자인데, 예원의 동생 보룡(寶龍)은 곧 문무왕의 모친이다. 내용은 <삼국사기>열전과 같이 역대 화랑들의 영웅담이 아닌 가승(家承)의 성격을 띠고 있다. 구성은 먼저 서문에서 화랑의 기원을 설명하고 이어 1세 풍월주(風月主:화랑)인 위화랑(魏花郞)에서부터 2세 미진부(未珍夫), 3세 모랑(毛郞), 4세 이화랑, 5세 사다함(斯多含), 6세 세종(世宗), 7세 설원랑(薛原郞), 8세 문노(文弩), 9세 비보랑(秘寶郞), 10세 미생(美生), 11세 하종(夏宗), 12세 보리, 13세 용춘(龍春), 14세 호림(虎林), 15세 유신(庾信)까지의 행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김유신 부분은 중간 이하가 탈락되어 김유신에 관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서문에 따르면 화랑은 선도(仙道)의 조직으로 그 기원은 고대에 신궁(神宮)에서 하늘에 제사하던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집행자는 처음에 여성이었으나 남성으로 바뀌면서 화랑이 되었고, 나중에는 낭도를 거느리고 서로 연마하는 제도가 되었다고 하는데, 낭도를 편제하여 준군사적인 조직을 만든 것은 사다함의 검술스승이며 진평왕 때 8세 화랑이 된 문노였다고 한다. 그의 모친은 가야의 공주였으므로 초기에는 배척받았으나 사다함과 연합하고 거칠부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세력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골품에 관계없이 인물을 기준으로 발탁하여 미천한 사람들도 발탁했으며, 낭도들을 동원하여 군사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본문의 서술방식은 먼저 가족관계와 행적을 적고 사람마다 끝에 찬(贊)을 달았다. 찬의 내용도 유교적인 찬이나 사평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주인공의 용모·행적 등 뛰어난 부분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화랑의 행적은 정치적·군사적 행적보다는 가족관계와 계보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내용 중 선교와 불교의 관계, 화랑의 자리를 둘러싼 각 파간의 암투, 가야파의 성장 등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이 책의 대상시기인 법흥왕에서 무열왕에 이르는 시기는 삼국의 대립이 거세지고 신라의 국가체제가 대폭 정비되던 시기로 이로 인한 관습의 변동, 왕실의 계층분화 과정과 모권의 역할변동, 사회 내부에서의 계층간의 대립을 암시하는 부분이 많다. 등장인물은 총 138명에 달하는데, 그간의 사료에 등장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또 신라골품에는 진골정통과 대원신통(大元神統)의 구분이 있는데, 대원신통의 격이 낮았다고 한다.

이 책의 내용을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부분과 비교하면, 근친혼 등의 사실을 배제하고 유교적 관점에서 보아 역사적 교훈이 되는 부분을 강조하거나 사건을 재해석했음을 알 수 있다. 일례로 화랑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별로 없고 후반부의 어진 재상과 충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화랑도에서 나왔다는 부분만 인용했다. 즉 사다함의 경우 <삼국사기>에서는 그의 친구 무관랑(武官郞)이 병들어 죽자 사다함은 이를 슬퍼하다가 7일 만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 <화랑세기>에는 그의 부하인 무관랑이 공로는 컸으나 미천한 신분 때문에 국가에서 보수를 받지 못하고 죽자 사다함이 이를 애통해 하다가 죽었다고 되어 있다. 1989년에 번역본이 간행되었다.

출처: 브리태니커

그들이 따랐다는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신라 진평왕 때 승려 원광(圓光)이 화랑에게 일러준 다섯 가지 계율이다. 원광이 수(隋)나라에서 구법(求法)하고 귀국한 후,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項)이 찾아가 일생을 두고 경계할 금언을 청하자, 원광이 이 오계를 주었다고 한다. 즉, 사군이충(事君以忠)·사친이효(事親以孝)·교우이신(交友以信)·임전무퇴(臨戰無退)·살생유택(殺生有擇)이다. 이는 뒤에 화랑도의 신조가 되어 화랑도가 크게 발전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이룩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지금 국민 모두가 화랑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역사학자로서는 최초로 긍정 평가한 사람이 1920년대 단재 신채호(申采浩)였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대통령이 청년의 애국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당시 육군본부 정훈참모였던 역사학자 이선근(李瑄根) 대령에게 한국사에서 청년문화의 유산을 발굴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이 대령이 ‘화랑도연구’(1954)를 출판했을 때 화랑은 하루아침에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청년 문화의 유산으로 부상했다. 그의 주장을 빌리면 이충무공, 개화파, 독립협회, 동학혁명, 3.1운동 온통 화랑정신을 빛낸 사람들이나 사건들이었다는 것이다. 화랑이 당초 여자였다는 것은 학계에서도 쉬쉬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최초의 화랑은 원화(源花)라고 불렀으며, 그들이 하는 일은 추석때 서라벌에서 아낙네들이 모여 패를 갈라 길쌈내기를 하던, 부락 축제의 리더 역할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라는 폐허 속에서 청년들을 전쟁터로 나가게 하기 위해 화랑을 무사도로 미화한 이선근의 논리는 분명 ‘빗나간 애국심’이었다. 차라리 고구려의 당나라에 대한 끈질긴 항쟁에서 청년의 기백을 찾는 것이 더 온당한 필법이 아니었을까?

출처: 증평괴산저널  

그러나 지금은 최정예 군인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의 정신적인 지주가 "화랑도"이며, 정부기관(전쟁기념관)에서는 신라 화랑으로서 백제와의 전투에서 적진에 나아가 전사함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화랑 관창(官昌)을 용감한 임전무퇴(臨戰無退) 화랑(花郞) 정신의 표상, 호국 인물로 선정하여 국민들에게 그 정신을 받들도록 교육한다.

화랑 관창의 적은 누구이며, 그들을 패배시켜서 승리한 나라는 어디인가. 은연중에 삼국간의 애증관계를 암시하고 강요하는 결과를 낳지는 않을까...

2013. 10.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