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의미
인간의 존재와 삶의 의미
Dum vivimus, vivamus, Horace (우리가 사는 동안, 잘 살아야 한다)
우리가 삶의 목적이나 의미를 고려할 때 우리는 실제로 무엇을 말하려 시도를 하는가? 우리는 뜻이 같은 단어 자체와 의미와 인식, 목적, 의도 그리고 목표의 차이를 가져오는 두 단어를 모두 사용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든 단어는 기본적으로 지정된 작용의 조사를 수반한다.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왜 인간은 존재하는가?
존재는 무엇인가? 만약 그것이 관찰 가능한 방식으로 자신을 충족할 수 있다면 우리들은 존재를 개체 또는 실재하는 사건으로 규정할 수 있다. 존재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지만 그 어떤 방식으로, 형태나 모양에 자신을 명시하지 않는 개체는, 자명한 정의에 의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행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의 구체적인 증거가 존재하는 인간 행위로서 보여져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의미가 없게될 것이다. 어떤 것은 생각컨대 다른 시공간 연속체 또는 또다른 우주에 존재할 수 있지만, 어떤 형태로든 형태나 모양에서 자신을 인간 행위로 명시하지 않는다면 인간 행위의 목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인간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여야만 한다.
인간 행위는 명백하게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인간 행위들로 자신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다른 특성 가운데, 인간 행위들은 주관적, 생리학적 수단에 의해 객관적, 과학적 기준으로 측정하고 관찰할 수 있는 군중성과 명백함을 가진다. 인간 행위들은 존재한다.
우리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물을 수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을까,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가?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 규정된 정의의 의미에서 우리들의 인생의 목적이나 의미가 있는가?
의미 또는 우연?
우리의 존재, 우리의 삶, 아무것도 아닌 우연한 사건인가,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강물의 파도인가? 만약 우리가 인간의 삶에 중첩된 의미나 목적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경우, 이러한 목적이나 의미를 우리의 삶에 불어 넣는 신비한 힘은 무엇인가? 이 불분명한 힘이 존재하는 경우, 어떻게 그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가? 이 불분명한 힘이 어떤 객관적인 형태로 인간에게 나타나지 않는 경우 지금까지 인간이 생각한 범위 안에서는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존재는 우리의 삶에 미리 예정된 또는 운명적인 의미를 전달 할 수 없다.
생물학에서는 인간을 동물로 정의한다. 다른 동물들은 그들의 생애에 부가된 의미 또는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 오직 사람만이 삶의 의미가 있다면, 다른 동물로부터 구별되게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유인원은 인간의 가까운 사촌이다. 그들의 삶에 부여된 의미가 있는가? 소, 돼지 또는 원숭이는 인간을 위한 먹이 역할을 제외하고, 그것의 생애에 부여된 것으로 여겨지는 의미나 목적을 가지고 있는가?
어떻게 인간의 생명이 존재하게 되는가? 이 창조의 과정에서 의미나 목적을 갖는 인간의 생명으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삶에서 생명의 창조에 따르는 의미를 획득 할 수 있는가? 이 목적은 인간의 몸에 있는가, 또는 영혼과 유사한 것에, 공허한 것에, 그 존재의 어떤 위치나 증거없이 존재하는가? 내가 존재하기 전에 어디에 있었으며 나의 죽음 이후에 나의 의미는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전은 단지 생명은 살아 있는 상태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NASA는 달에 유인 로켓을 보냈을 때, 그곳의 과학자들은 우주선의 귀환에서 지구를 오염시킬 수있는 외계 생명체의 가능성을 염려했다. 이 분석에서의 첫 번째 단계에서 생명의 정의에 도달하였다. NASA는 생명이, 모든 생명은, 어떤 시스템의 속성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a. 복제의 능력, b. 엔트로피(내부 운동의 복잡성)를 보상하는 에너지 변환의 능력, 그리고 c. 진화 과정의 주체라고 보았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진화 과정의 지원으로 복제되어야 한다. 생명의 이 기본적인 메커니즘의 신비한 힘은 생존본능이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고통/쾌락 원리에 뿌리를 둔다. 이 원칙은 간단하게 언급 할 수 있다. 인간 존재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항상 최상의 이기심으로 끌리는 것에 행동을 한다.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향상시키기 위해. 단지 불쾌한 감정으로서 고통을 인식하고, 자신의 존재에 위협을 느끼는 생물만이 생존하고 복제된다.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에 있는이 고통/쾌락 증후군의 존재는 인간은 항상 자신의 실제 최고 이기심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인간 행위의 유전자는 자기가 자신의 최고의 이기심으로 믿는 것을 행동하게 한다. 어떤 사람은, 그가 가장 자신의 이익에 적합한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파괴적인 행동에 빠진다. 자기 파괴적인 사람은 비정상적이 되며 자신의 보호를 위해 사회를 자기에게 맞추려 한다. 자기 중심적이 되기 위해, 항상 우리가 우리 자신의 최고의 이익으로 간주되는 어떤 행동을 취한다는 생각은, 모든 생명의 궁극적 필수적인 사항이다.
적자생존은 진화 과정의 진수이다. 생존 및 복제를 보장하기 위해 그것의 환경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생물체의 능력이다. 생존을 위한 유전적으로 부과된 본능이 없다면, 생명체는 자신을 영속시킬 수 없거나 그것의 종은 미래의 복제 및 진화로부터 자신을 제거시킬 것이다.
생존을위한 끊임없는 투쟁에서,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는 지속적으로 제한된 자원을 위한 싸움에 종사하게 된다. 박테리아나 지렁이와 같은 하등 생활양식은 그들에게 본질적으로 부적당한 환경에 대한 작은 제어 여지만 있다. 유일하게 사람은 합리적인 사고 과정을 발달시켰다.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만은 본질적으로 안전하지 않은 세계에서 높은 수준의 생존과 보안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이성적인 생각을 활용할 수 있다.
그의 존재의 상태를 이해함에 의해 환경에 대처하는 그의 능력을 강화하는 노력으로, 인간은 질문을 제기하는 정신능력을 개발하였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왜 하는가? 삶에 목적이 있는 경우, 어떻게 그것을 준수 할 수 있거나 어떻게 그것을 향상시킬 수 있는가? 반대로, 내 인생에 아무런 목적이 없는 경우, 생명이 완전히 무의미할 경우, 인간이 미리 예정된 의미나 목적없이 방황하는 경우, 왜 삶의 역경에 굴복하지 않고 자살로 모든 잠재적인 미래의 충돌을 해결하지 않는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사느냐 죽느냐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진화는 유전적으로 인간의 행동이 자살을 쉽게 감행할 수 없도록 인간을 구성하고 있다. 우리들의 매우 강력하고 투철한 생존 본능은 사람이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병든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의 자살을 방지하고 자기파괴가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 깊이 내재되어 있는 유전적 생존 메커니즘은 생존 경쟁을 가능하게 하거나 또는 다른 생명체로 존재하게 한다. 또한 우리의 유전자를 영속하기 위해 우리를 강제하는 우리의 모든 강력한 생존 본능이 없으면 인류는 결코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고, 인간은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진화 기간 동안, 인간의 객관적 실재의 실제적인 지식의 부족은 심각하게 자신의 환경에 대한 이해를 제한시켰다. 우리 삶의 사건들을 효율적으로 고려하기 위해 우리는 객관적인 실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그들이 나타나는 모양을 볼 때 그것들이 실제로 어떻게 그렇게 되었나를 알 필요가 있다.
그 삶의 역경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삶의 목적을 찾기 위한 그들의 필요로서, 인간은 초자연적인 존재를 발명했다. 그는 자신의 환경의 신비한 힘에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기도, 제사 또는 유사한 예배에 응답하여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보장하는 신들과 다른 신비한 힘들을 발명했다.
인간은 이렇게 신들이 인간을 창조했고, 사람들은 그러한 우월적인 존재의 통제와 보살핌 아래 놓여있다는 허구를 고안하였다. 따라서, 사람은 그들의 선의와 보호를 보장하기 위해 자신을 그들의 의지에 복종시킴에 의해 이러한 신들을 달래고 기쁘게 하는 것이 그 생애의 목적이라고 믿었다.
그와 같은 전능한 존재가 실제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객관적인 증거는 없으며, 혹 그들이 존재하더라도, 그들이 개별적인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거나 또는 그들이 미리 지정한 목적으로 인간의 삶을 살게 하지 못한다. 만약 누군가가 인간의 삶에 미리 지정한 목적이 있음을 주장하는 경우, 이러한 주장은 좋게 말하면 단지 완전하게 문서화되지 않은 의견, 또는 나쁘게 말하면 환각이다. 그것은 어떠한 증거의 단서도 없는 특별한 주장일뿐 아니라, 그것은 또한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모든 구체적인 증거에 모순이다. 합리적인 인간 행동은 특별한 주장에 대한 특별한 증거를 필요로 한다.
종교적이거나 신화적인 신앙체계는 믿음이 요구된다. 앰브로즈 비어스는 과거 다소 익살맞게, 그러나 신랄하게 믿음의 개념을 정의하였다. "무엇을 증거없이 믿는 것은 유사성이 없는 것들의 지식없이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야기 된다". 검증되지 않은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든 활용 가능한 실제적인 지식과 충돌하게 되며, 객관적인 실재의 본질에 자신을 드러낼 수 없거나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입증되지 않은 견해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하는 사람은 최적의 효율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환경에 대처하는 자신의 능력을 감소시킨다. 이것은 어리석음이며 사람들이 그들의 존재 안에서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고 운명되어진 목적을 찾고자 할 때 지불하게 되는 진정한 대가이다.
그것의 창조 과정 중 또는 후에 인간의 삶에 의미나 목적을 불어 넣을 수 있는가? 정자와 난자의 결합은 인간 생명을 만든다. 이 과정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난자와 수억의 정자로 이루어진다.
두 가지 요인이 정자와 난자를 수정하게 결정한다. 첫 번째 요인은 난자에 대한 특정 정자의 접근성이다, 그것은 그것의 고유한 유전자를 갖고 있는 특정 정자의, 시간적으로 최적의 순간에 최적의 위치에 있다는 단순한 기회이다. 두번째는 난자의 수정을 위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여러 정자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건강한 정자 만이 다른 정자보다 먼저 실제로 난자에 도달할 것이다. 그 결과는, 적자 생존이며 종의 진화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인간 생명의 창조에 관련되어 단지 두 개의 요인이 있다, 임의성과 적자 생존이다. 만약 개별적인 인간 존재의 형성에 다른 요인을 부여한다면, 임신 또는 임신 후 어느 시점에서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이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생명의 창조에서 그것을 명시적으로 증명할 다른 요인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간 생명의 창조에는 다른 요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의 삶에 부과된 미리 예정된 의미나 목적에 관한 어떠한 증거도 없다. 인간의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닌 우연성과 적자 생존의 결과이다.
인간 행위와 감정, 그리고 지구에서의 그들의 지위에 관한 이 진화론적인 발달의 관점이 일부 사람들에게는 다소 불안할 수 있다. 인간 존재의 창조의 과학적 관점은 인간에게 부과된 미리 지정한 의미나 의도된 목적의 객관적 증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는 개인적인 존재로서, 무의미하지만 난자와 수백만 중 하나의 정자 사이의 우연한 만남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특정 난자와 특정 정자의 임의의 결합을 통해 존재하지 못하였다면, 나는 결코 의미에 관계없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별적인 존재로서,내가 있는 것은 우연에 기초한 하나의 사건이다. 다른 요소가 내 생성에 관여하였다는 증거는 눈꼽만큼도 없다. 인간 생명에는 아무 의미나, 중요성, 목적과 만족시킬 운명도 없다.
종교적인 사람은 신 또는 신들이 인간의 생명에 의미를 부여했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주장에 맞설 것이다. 이 가정을 지원할 아주 작은 객관적인 증거조차 없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성경에 그렇게 말하였다고, 그것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일부 사람에게는 인간의 유전자 구조의 우연한 생성이 불안한 개인의 자기 중요성과 자부심에 반대되는 영향을주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어떤 현대 철학자들은 인간의 삶에 예정되어진 의미의 부족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결론의 논리적 순서에서 벗어나려 한다. 실존주의자들과 같이, 인간의 삶에서 목적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우리, 우리들이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인식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깨달았다.
객관적 실재에 대한 다른 현실도피자들은 영혼이나 신들 또는 다른 신화적인, 전지전능한 존재로 상상의 개념을 발명한다. 어떤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러한 존재를 의미나 목적이라는 신비한 개념으로 인간에게 주입한다.
인간의 존재에 예정된 목적이 없는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삶 동안 무엇을 하여야 하나? 진화의 임의성과 냉혹한 세계는 삶과 인간 존재를 찾는데 실망스럽고 따분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인생을 어떻게 살것이며, 망상 또는 환상으로 가는 황홀한 여행이 이 현실로 대체될 것이다. 우리는 울지 않아야 한다, 단지 우리의 삶에 예정된 목적을 불어넣을 신들, 영혼들, 거룩한 것 또는 다른 어떤 것이 없기 때문에. 대신에, 우리는 삶의 행복과 즐거운 경험을 향상시키기 위해 우리의 이성적인 마음을 활용하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했을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에 충성할 의무가 없으므로, 그리고 우리는 자살을 감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좋든 나쁘든, 이 존재함에 맞서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성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우리는 그것을 끝냄에 의해 이 존재함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우리의 실존에서 존재하지 않는 목적이나 의미에 대한 탐구보다, 우리는 모든 생활을 지배하는 기본 원리를 따라야 한다. 우리는 행복을 위해 노력하여야 하며, 고통이나 정서적인 불안을 제거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는 감정의 건강한 상태를 구해야 한다.
인간존재는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의 요구에 따라하지 않으며 인간은 분명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우리 주변의 말들을 인식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갖는다. 우리는 우리가 관계된 세상을 바꿀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우리는 인생이 끔찍하고 추하다고 말할 수 있다, 또는 우리는 그것이 아름답고 즐겁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법에 대한 부담을 갖는 것에 따라 최대한 인생을 즐길 수도 있다. 우주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비참하거나 멋지게 인식하는가에 대해서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 이 선택은 우리 개개인에게 개별적으로 주어져 있다.
우리의 개별적인 인생은 우리의 임의의 창조로 시작된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의 생명은 고통을 최소화하고 우리의 건강의 느낌, 행복을 크게하는 감정을 최대화하기 위해 우리의 능력을 발전시킨다. 우리가 죽을 때, 임의성은 또다시 작동된다. 엔트로피의 법칙, 즉 우주의 궁극적인 동일성은 우리의 구성원자들의 적절한 임의성을 또다시 제공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 진화하지 않고 생명이 있을 수 없으며 그 개인의 죽음없이 종의 진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은 랜덤에서 랜덤까지의 일시적인 체류이다. 그것은 두 사건 사이의 간격에서 우리에게 슬픔이나 즐거움으로 다가 온다.
인간의 목적에 대한 관심
어떤 사람은 많은 믿음 체계의 또 다른 것으로, 신들과 악귀에서 자유로운 합리적인 세계관을 고려한다. 그들은 객관적 실재의 합리적인 안목이 종교적 신앙체계보다 행복을 달성하기에 더 좋은 효과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신앙 기반의 신념 체계와 삶의 합리적인 철학 사이의 차이는 환상의 거부와 과학과 자연법칙의 틀에서 객관적인 증거에 의해 견고히 자리잡은 사실의 확증에 근거한다.
신앙 기반의 신념 체계를 과학으로 선언하는 것은 지식의 부족을 의미하고 혼란시킴과 자기기만을 제시한다. 과학은 신앙 시스템의 정반대이다. 과학에서 믿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과학은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믿음은 오직 사람이 과학은 이미 그것이 거짓으로 판명된 후 사실로서 그것을 선택한다면 요구되는 것이다. 과학은 기적을 고려하지 않고 과학은 정밀도와 반복성을 갖는 객관적 사실의 영역이다. 과학은 때때로 창조 과학이라 일컬어지는 의사 과학의 화해할 수 없는 상대이다.
객관적인 실재와 인간 존재의 합리적인 관점은 실존주의로 알려진 철학적 방향으로 약간의 유사성을 보일 수 있다. 실존주의는 모순된 논리로서, 유신론과 무신론의 형태로서 초자연이며 구조화되지 않은 불안정한 형태로,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의 형태를 띤다.
실존주의는 인생에서 의미나 예정된 목적의 부족을 한탄하는 절망의 철학이다. 그것의 혼란으로, 실존주의는 우리의 삶 자체에 목적을 부여하는 과정을 불가능하게 하여 우리에게 부담을 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런 의미를 필요로 하는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하는데 실패하였다. 실존주의는 사르트르와 하이데거에 의해 지지되어, 사람들이 단순히 최대한 인생을 즐기는 것 대신에 인간 존재의 따분함을 비탄하게 하였다.
신화와 종교는 역시 모든 객관적인 증거에 반하거나 믿기 어려움에도, 외적인 의미나 목적을 인간 존재에 부여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신비한 믿음의 시스템들은, 사실이나 증거에 의해 완전히 지원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수용된다. 그들은 또 그들에게 상상적인 일들을 줄 수도 안줄 수도 있는 가상의 신을 만들어 보이지 않는 살아가는 이유를 불러낸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상상되어진 죄들의 짐을 지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죄책감과 맹신을 가지게 한다. 그것은 그래서 그들이 범하지 않은 죄로부터 자신을 용서받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기도하기를 강요한다. 이 방법은 분명 인생에서 행복과 기쁨을 얻는 의도와는 반대이다.
인본주의는 인생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거나 세계와 인간적인 조건을 개선하는 것으로서, 신화와 종교에 피하지 않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 또다른 복합적인 개념이다. 개선이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상대이지만, 인본주의자들이 선하거나 개선이라는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시도는 없다. 히틀러는 자신의 특별한 방법으로 인간적인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인본주의자들은 또한 인간의 고유한 존엄성을 선포함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사람에 관한 본질적인 존엄함이나 존엄하지 않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단순히 생명의 열등한 형태에서 진화될 뿐이다. 생명에서 의미를 찾는 인본주의적인 접근 방식은 그것이 인간 존재의 진화적 특성에 대한 잘못된 가정들로부터 논의되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우리의 행복을 강화하기 위해 우리의 진화론적 필요를 앎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생애에 예정되었거나 또는 스스로 부여된 의미에 대한 모든 요구를 없앨 수 있다. 우리 감정의 진화론적 기본의 단순한 지식에 의하면 외부 또는 내부적으로 할당 된 목적이라는 견지에서는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모든 개인들이 생애에서 그의 목표를 인간 진화, 감정 구조에 입각해 행복한 삶을 이끄는데 둔다면, 모든 인류 세계의 모든 개인이 행복해질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것은 인생의 존재하지 않는 목적을 찾거나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며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보다는 우리 자신의 행복을 높이기 위해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아무에게도 행복을 빚지지 않았으며 아무도 우리에게 행복을 강요하지 못한다. 행복은 어떤 주어진 순간에, 우리가 선택함으로 가지거나 포기할 수 있는 우리의 것이다. 우리는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의 능력을 포기하면 안된다. 다른 사람은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감정적인 만족 상태인 행복의 느낌은, 우리 자신의 손 안에 있으며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 달려있다.
인간의 생명에 존재하지 않는 목적을 삽입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최상의 확실함으로 실재를 보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배제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건강과 행복한 삶에 역효과를 준다. 인위적으로 부여된 의미는 가장 생산적인 방법으로 객관적 실재를 다루는 것에서 우리를 배제시킬 것이다.
인생의 의미를 위한 탐구는 의료 돌팔이 행위와 유사한데 우리가 맹신과 효력이 없는 행위를 허용하는 것은 우리의 환경을 다루는 합리적인 수단을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의미나 목적을 위한 탐구는 사람의 타고난 특성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방식으로 합리적, 효율적인 삶으로 가는 우리의 기회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의미에 대한 쓸데없는 탐구는 객관적인 실재와 우리 자신을 올바르게 정렬하려는 것에서 우리를 차단한다. 그것은 인생의 유일한 진실된 성공(최적화한, 행복의 지속)을 달성할 수있는 우리 능력을 좌절시킨다.
출처
http://www.rationality.net/religion.htm
너무도 긴(?) 따분한 글이다. 사실 나는 이 글의 내용을 모른채 한두줄씩(정확하게는 구글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더듬거리며 우리 글로 옮겨보았다. 인생의 반짝이는 의미에 대한 글일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진화와 적자생존이라는 논리로 무장한 평범한 과학적 만능주의에 입각한 글이 정체를 드러내었다. 몇번을 포기하려 했으나 논리가 너무도 진부하여 무언가 토를 달고 싶어 인내를 발휘하였다.
어떤 분은 이 글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견지에서는 이 글은 너무도 황당한 논리를 주장하는 나쁘게 말하면 사람들을 현혹하는 글의 모양을 갖추되 제목과 내용이 다른 글이라 생각되었다.
몇줄로 요약할 수 있는 글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1) 인간의 생성은 우연한 수정과 적자생존의 결과이다.
2)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3) 부나비와 같은 인간은 아무 생각없이 행복을 위해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야 한다.
4) 인생은 우연의 과정으로 끝없이 반복된다(숨겨진 논리)
이 글을 읽으면서 인내를 요구한 것은 저자가 강조하는 과학이라는 것이 바로 저자가 신봉하는 신앙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은 과학이지만 자신이 모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모두 미신이나 허구로 간주하였다. 이것이 바로 맹신자가 아닐까.
저자가 보는 시간은 인간의 수태 순간부터 죽음까지이며 진화의 매커니즘도 유전자의 발현도 전혀 언급이 없다.
그에게는 생명의 기원도, 지구 환경의 관련성도 시간의 연속성도 고려할 대상이 아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너무도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웰빙이라는 이름으로 눈에 보이는 현실에만 의미를 부여하는 세태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선지자가 아직 그에게 말할 때에 왕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왕의 모사로 삼았느냐 그치라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 하니 선지자가 그치며 이르되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줄 아노라 하였더라
(역대하 25:16)
선지자는 유다왕 아마샤의 육체적인 매를 두려워하여 예언을 중단하였으나 그의 예언은 성취되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다 하여 실체를 부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편의 논리를 자신의 잣대로 깡그리 무시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겠다.
2014.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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