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

연옥(煉獄)은 라틴어로 "Purgatorium"이며, “깨끗하게 하다”, “정화하다”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영어로는 "Purgatory"라 한다.  이탈리아 작가 단테의 서사시 "신곡"에서도 연옥이 소개되고 있어서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말이다. 죽은 자들이 자신의 죄를 깨끗이 정화시켜 천국으로 이르게 하는 곳이라 한다. 사람들에게 은연중 죄인들에게도 자신을 정화시킬 한번의 기회가 더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는 아주 좋은 배려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곳이 존재하는지는 아무도 확언하지 못한다. 그곳은 사람들이 사망한 이후에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연옥이라는 개념은 천주교(Catholic Church) 신앙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며, 이것들은 마르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의 요인으로도 작용하였다. 또 이 교리는 기독교(Protestant)에서 천주교를 공격하는 좋은 빌미가 되기도 한다.   

천주교 입장

연옥에 대한 신앙교리는 피렌체 공의회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확정되었다. 교회(카톨릭)가 연옥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받을 것입니다"(1베드 1,7).

"만일 그 집이 불에 타버리면 그는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불속에서 살아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1고린 3,15).

연옥은 불로써 표현된다. 불이란 정화시키는 것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옥의 불을 면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옛 기도문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도 연옥에 관계된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유다 마카베오가 죽은 이들이 그들의 죄에서 풀려나도록 그들을 위해서 그 속죄의 제물을 드리게 하였다(2마카 12,45 참조).

성서뿐 아니라 성인(聖人)들도 연옥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그의 대화집에서 "어떤 죄들은 현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으나, 어떤 죄들은 내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연옥에서 죄의 잔재를 용서받을 수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주저하지 말고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드리자."고 호소했다.

우리 교회는 초대교회 때부터 죽은 이들을 존중하고 기념했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와 미사 성제를 드려왔다. 이러한 전통은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또한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뿐 아니라 자선과 대사(大赦)와 보속도 권고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요즘 우리에게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 예를 들면 연옥 영혼들에게 대사를 받도록 기도하는 것이 무력화되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분명히 말한다. "정화중에 있는 죽은 신자들도 성인들과 통공을 이루는 같은 지체들이므로 우리는 그들을 위한 다른 도움과 더불어 특히 그들의 죄로 인한 잠벌(暫罰)을 면하게 하는 대사로서 그들을 도울 수 있다."

바오로 6세의 교황령에 따르면 "대사는 죄로 인해 받게 될 일시적인 벌을 부분적으로 면제하느냐 전적으로 면제하느냐에 따라 부분대사와 전대사로 구분된다." 즉 잠벌을 어느 정도 면하게 할 수 있는 한대사(限大赦)를 받을 수도 있고 완전하게 잠벌을 면하게 할 수 있는 전대사(全大赦)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간 영혼들에게 전대사를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그 뜨거운 연옥의 형벌을 면하게 할 수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귀한 선물일 것이다.

출처: http://user.chol.com/~simjy49/ritual/r_98.htm

 

논거에 대한 비판

베드로전서 1장7절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개역개정)

"That the trial of your faith, being much more precious than of gold that perisheth, though it be tried with fire, might be found unto praise and honour and glory at the appearing of Jesus Christ:"(King James Version)

베드로전서 1장3절-12절까지 성경 단락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불(fire)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연옥과 연관시켜 생각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단락은 개역개정에서는 "산 소망"이라는 소제목을 붙여서 믿는 자들이 모든 시험과 환란을 받지만, 믿음으로 이기면 불로 가열하면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게 되어 자기 영혼의 구원과 더불어 그리스도에게 큰 기쁨을 받으리라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고린도전서 3장15절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개역개정)

"If any man's work shall be burned, he shall suffer loss: but he himself shall be saved; yet so as by fire."(King James Version)

고린도전서 3장10절-17절까지를 읽으면 믿는 자들이 자기의 공적(즉 work)을 쌓을 것이고 그것들은 어떤 날, 즉 예수님이 심판하는 그 날에 밝혀지고 그 정체가 드러날 것이라 한다. 그것을 비유적으로 말하여 공적이 불로 태워질 것이라 한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각 재료 금, 은, 보석, 나무, 풀이나 짚으로 공적(다른 말로는 집)을 쌓을 것이므로 심판의 불로 태워지면 불에 타는 헛된 공적은 흔적도 없어질 것이나 금, 은 등은 불에도 타지 않고 남아있어 그 공적을 쌓은 자가 상을 받을 것이라 말씀한다. 그러나 불에 타는 공적을 쌓은 믿는 자들은 구원은 받되 상급은 없으리라는 것이다. 연옥에서 심판을 받지 않는 바에야 이 성경구절에서 연옥을 연관시키는 것은 너무 자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천주교 주장을 한번 더 조사해 보니 구원은 받되 즉, 지옥의 형벌은 면하지만 불로 고통을 받는 연옥에서 불로 태워질 나무 풀, 짚을 자신이 죽기전에 저지른 모든 악행으로 해석하여 그것들을 태우면서 연옥에서 정화과정을 견뎌야 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마카비2서12장38절-45절

[38]그리고 그 후 유다는 자기 군대를 모아 아둘람이라는 도시로 갔다. 제칠 일이 다가 오기 때문에 유다인들은 관습대로 몸을 깨끗이 하고 그곳에서 안식일을 지켰다.

[39]유다와 그의 부하들은 전사자의 시체를 묻어야 할 날이 촉박하였으므로 시체들을 거두러 가야만 했다. 그 시체들은 그 다음날 조상들의 묘소에 운반하여 친족들의 옆에 함께 묻어 주려고 했던 것이다.

[40]그런데 그 시체 하나하나의 옷을 들쳐 보니 그들은 얌니아의 우상을 부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유다인이 이와 같은 물건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은 율법이 금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죽은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되었다.

[41]그들은 숨은 일을 모두 드러내시는 정의의 재판관이신 주님을 모두 찬양하였다.

[42]그리고 죽은 자들이 범한 죄를 모두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고결한 유다는 군중들에게 죄지은 자들이 받은 벌이 죽음이라는 것을 눈으로 보았으니 이제는 그들도 죄를 짓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43]그리고 유다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은 이천 드라크마를 모아 그것을 속죄의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써 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이와 같이 숭고한 일을 한 것은 부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4]만일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허사이고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

[45]그가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마카비서는 기독교에서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전이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인정을 하는 경전이므로 연옥을 주장하는 논거로 언급을 하는 듯하다. BC 167년 유다를 다스리던 셀류쿠스 왕조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가 유다를 헬라화 하면서 전통적인 종교행위를 탄압하자 대제사장 가문 마따디아가 이에 반기를 들고 혁명을 주도하였다. 유다(Judas Maccabee)는 마따디아의 아들로서 BC 166-160년까지 혁명군을 지휘하였다. 이 때의 기록이 논거에 인용한 마카비서이다. 인용한 구절들을 요약하면 전투 중에 죽은 군사들의 몸을 뒤져보니 모두 얌니아의 우상을 지니고 있었다. 유다는 그들이 모두 율법을 어겼으므로 그들의 죽음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다만 그의 고결한 성격과 그의 사후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여러 사람으로부터 돈을 모금하여 그 돈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보내어 그들의 속죄제를 지내게 하였다. 이것이 그당시 유다 민중들의 생각인지 율법에 명시된 것인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속죄행위가 이루어지리라는 신념을 가졌다는 사실 밖에는 없다. 유다 마카비의 신념이 연옥이 존재하는 근거가 되는지 불분명하고, 일부 유다 민중의 사후 세계관이 연옥의 존재를 확증한다고는 볼 수는 없다. 또 율법에서는 죽은 자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라는 항목은 존재하지 않는다.

 

 

산 자와 죽은 자가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산 자가 죽은 자를 생각하고 그를 기념하는 것 또한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는 그것으로 그쳐야 합니다. 산 자의 기도로 죽은 자를 좋은 곳으로 옮긴다거나 죽은 자들이 연단을 받아 더 좋은 곳으로 간다는 생각은 인간의 상상일 뿐입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영원한 안식처로 가기 위한 예비 단계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장32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인간이 현세의 삶을 마치면 대부분이 자신의 행위의 결과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때의 심판은 변할 수 없는 결과입니다. 누구의 기도와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단 한번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항상 깨어 있으라고 제자들을 다그치셨습니다.

현세의 삶은 우리 마음대로 살라고 아무렇게나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에게 심한 꾸지람 아니 저주를 받은 집단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행동에서 바르고 하나님의 율법에 충실하였습니다. 그들이 꾸지람을 받은 이유는 외식(外飾)하고 경건을 뽐내고 다른 사람들을 참된 구원으로 인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이는 예수님 이외에는 없습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자신의 것을 베풀고 양심에 충실하며 좋은 말씀을 따라 사는것은 옳은 길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자신을 구원한다는 믿음은 헛됩니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미안하고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지만 진리는 둘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연옥이라는 이름은 불타는 형벌의 장소인 지옥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말씀으로 저의 생각을 마무리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태복음 7장13절,14절)

 

2014.10.10.